▲오전 9시30분 계획교류 파견 및 임기제 서기관 임용장 수여/ 접견실 ▲오전 11시 영상메시지 촬영/ 영상편집실
문갑도는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3㎞, 인천 뭍에서는 약 54㎞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면적은 3.54㎢에 달한다. 문갑도에 가기 위해서는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덕적도 도우선착장에서 내려 덕적군도를 선회하는 나래호를 타야 한다. 문갑이란 이름은 섬의 전체 모양이 예전 선비들이 사용했던 ‘문갑’과 유사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섬의 대부분은 경사가 급해 해안절벽을 형성하고 곳곳에 파식대가 잘 발달해 있다. 다만 섬의 동쪽 해안은 경사가 완만해 마을이 형성돼 있고, 마을 뒤편에는 넓지 않은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또 섬 동쪽에는 만곡형의 해안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모래가 퇴적돼 사빈을 이루고 있으며 섬 북동쪽에는 한월리해수욕장이 자리한다. 문갑도 마을을 거닐다보면 다른 섬에 비해 집집마다 유독 크고 작은 독이 많고 한월리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는 깨진 독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는 문갑도가 1970년대까지 새우가 엄청나게 많이 잡히는 풍요로운 섬으로, 새우젓을 담는 독을 짓는 공장이 세 곳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문갑도의 북동쪽 한월리해수욕장 근처 야산에 새우 젓갈을 담는 독을 만들었던 가마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주민의 말씀에 따
박물관이 한 나라 또는 도시에 주는 의미와 상징성은 지대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박물관(博物館)의 한자 뜻 그대로 ‘온갖 잡동사니를 펼쳐놓은 곳’이라는 풀이와 달리 그곳은 해당 국가나 민족, 나아가 인류의 역사와 혼이 집약된 공간이다. 정신의 결정체요, 땀이 흠뻑 배인 노력의 산물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H.카의 말처럼 박물관은 또 현세의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았던 조상들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유물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궁하고 장중하다. 책, 문서 등 역사기록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정치상황 등에 따라 얼마든지 위·변조나 왜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물은 거짓이 없다. 켜켜이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내력은 우리에게 늘 크나큰 울림으로 자리한다. 20~30년 전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세울만한 이렇다할 것이 없었던 시절, “나라 밖에 나가 보면 코리아는 몰라도 △△, ×× 등 한국 기업을 아는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놀라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국격(國格)을 높이는 매개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때 우리나라처럼 세계 일류급 기업을 비롯해 민주적인 정치,
▲임옥분씨 별세, 김정렬(공정무역인천광장 공동대표)·정명·정희·정옥씨 모친상 = 17일, 인천시 남동구 길병원 장례식장 302호실, 발인 19일 오전 6시 20분, 장지 인천가족공원. ☎010-3402-3666.
양천 허씨가 백령도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신적, 물리적 영향력을 발휘해 백령도를 비롯한 황해도 일대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분은 허간(許侃, 1885~1972) 목사다. 그의 생존 시기는 개화의 물결이 조선을 휩쓸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다. 그만큼 격정과 고난의 세월 속에 신앙인으로서의 마음을 바탕에 두고 교육자 겸 항일투쟁을 통한 지역운동가로서 고군분투해 백령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 내용은 종교사 내지 신앙인에게만 명맥을 유지한 채 희미한 불빛처럼 이어지며 대중적 접근에는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주된 활동무대가 백령도와 이웃한 황해도라 지역적 한계가 있지만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이 자못 크다.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국유화를 시도했던 조선총독에 대해 주민과 함께 조직적인 저항으로 민영화를 이끌어낸 그의 활동을 소개한다. ▶ 체크포인트1. 허간 약사(略史) 그는 1885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 연화리(중화동)의 양천 허씨 가문에서 허근(許根)과 이근식(李根植)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허득, 아버지 허근, 그리고 본인에 이르기까지 허씨의 종손이었으며 호는
“사면이 암초에 도속된 서해안의 조그만 섬..(중략)..멀리 바다 건너로 신기루 같이 떠오르는 인천항.” 출연진이 모두 8명으로 이뤄지는 연극 대본 ‘지문’의 일부이다. 지문에 나오는 인천항과 서해의 조그만 섬을 주제로 한 희곡(시나리오)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천(동구)이 낳은 극작가 함세덕의 해연(海燕, 단막극)이다. 동구 화평동 455번지에서 1915년 함근욱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함세덕은 월북 후 다시 월남(1950)하던 중 신촌에서 사망, 36세를 일기로 요절한 불세출의 희곡작가였으나 문학에 입문할 초기에는 시를 썼던 시인이었다. 처녀작 ‘고개’가 <월미>라는 잡지에 실린 일도 있으나 일찍이 희곡에 집념했던 그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희곡이 바로 ‘해연’이다. 홀아버지와 함께 사는 주인공 ‘진숙’은 인천 여자고교를 다니던 여학생이었으나 아버지를 모시느라 학교를 그만둔 효성이 지극한 여식으로, 아버지는 서해안의 작은 섬 등대지기로 세상을 잊으며 살고픈 인물. 하인천에서 박외과를 운영하는 안 의사라는 또 한 사람의 남자 사이에서 난 청년 세진은 진숙과 사랑하는 연인으로 아버지(등대지기)의 전(前)처에서 난 남매들이었
▲오후 2시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제97차 임시보고회(온라인)/ 시청 접견실
백령도 중화동(中和洞), 행정구역은 연화2리. 이 지명에서도 신앙의 향기가 풍긴다. ‘중(中)’은 ‘가운데’, 즉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으며 치우침이 없는 올바른 덕(德)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이 신앙의 자세로 강조하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이자 신앙인 것이다. 화(和)는 ‘화(禾)’와 ‘구(口)’의 합성어다. ‘화(禾)’는 나무 줄기에 이삭이 드리워진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로 가장 좋은 곡물인 벼, 곡식 등의 열매를 의미한다. ‘구(口)’는 어귀, 관문, 먹는 입, 말하는 입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합하면 ‘화(和)’는 ‘말씀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결국 ‘중화’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으로 말씀의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중화동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지명 자체가 신앙과 밀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 체크포인트 1. 중화동교회의 초창기 예배 모습 1897년 서경조 장로가 첫 예배를 드렸던 곳은 서당을 겸했는데, 최근에 간행된 ‘만성 허응숙 목사’(보고사)에 기술된 내용을 소개한다. 서당 겸 예배당은 초가집이었으며 후에 함석집으로, 또 그 후에 벽돌 기와집으로 개축하기를 네 차례
▲오전 8시 공직자 아카데미/온라인 ▲오전 10시30분 정책현안회의/온라인
▲오전 10시 8월 실국장 회의/ 온라인 ▲오후 2시 인천 먹거리 종합계획수립 용역 최종보고회/ 시청 접견실